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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J-RPG 하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나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를 생각할 것이다. 필자 역시 그렇다.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던 시절에도 “게임 월드”, “게임 챔프” 를 붙들고서 어떻게든 게임을 진행시켜보려고 안달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난다.

그 시절은 게임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에 비해 현저히 낮았던 하드웨어 성능의 시대였다. 게임 매커니즘을 개발하는 담당자들은 게임의 스토리 및 세계관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정된 메모리 내에서 구현해야 했다. 모험에서 만나는 수많은 적과의 전투를 모두 “액션” 으로 처리하기에는 당시 하드웨어 성능으로는 꿈도 못꾸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J-RPG는 적과 조우하는 방법에도 프로그램 적인 꼼수를 도입했다. 그 방법이 바로 “랜덤 인카운터” 였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게임의 캐릭터는 드넓은 월드 맵이나 던전 속을 걸어다니다 시각적인 신호나 그래픽이 없이 그냥 랜덤으로 적을 만나게 되었다. 적을 만나게 되면 바로 화면이 전투 화면으로 바뀌게 되었고, 적을 모두 물리치거나 전투에서 낮은 확률의 “도망가다” 를 선택해서 도망이 성공해야지 전투 화면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랜덤 인카운터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방식이지만 그 시절의 게이머들은 이런 천재적인 프로그래밍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받아들였다. 시각적으로 적이 보이질 않기 때문에 좀 더 긴장감 있게 맵을 탐험할 수 있었고, 전투 화면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에는 가끔식 나오는 강적들에 대한 조바심으로 모험의 긴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험 도중에 적과의 우연한 만남”이란 감성이 게임으로 구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이에 대해 대체로 수긍했고 J-RPG 게임은 가정용 게임기를 대표하는 장르로 성장했다.

하지만 랜덤 인카운터 방식은 자칫 적을 만나는 빈도가 적절하지 않으면 상당히 짜증나는 시스템이었다. 특히 적을 만나는 빈도가 너무 잦으면 스토리의 연결이 끊어지고 탐험의 재미가 반감되었다. 또 전투가 길어지면 다시 월드 맵에 돌아왔을 때 자신이 지나온 길이 어딘지 햇갈리는 길치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랜덤 인카운터” 의 단점은 차세대 게임기들이 출시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플레이 스테이션, 세가 새턴, 엑스박스 등 차세대 게임기들이 등장하면서 게임 소프트를 담는 저장 매체도 기존의 롬팩에서 CD 로 교체되었다. CD는 롬팩보다 싸고 많은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차세대 저장 매체였지만, 롬팩으로 게임을 하던 게이머들에게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로딩 화면’ 이란 새로운 짜증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특히 J-RPG 장르의 게임에게 “로딩 화면” 은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다. J-RPG의 특성상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수 백번 혹은 수 천번의 전투를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로딩 화면을 경험해야 했다. 특히 랜덤 인카운터가 잦은 게임의 원치 않은 전투+로딩 화면이 게이머들을 미치게 하였다.

차세대 게임기가 출현하면서 이제 더이상 랜덤 인카운터 방식을 도입한 J-RPG는 새로운 시리즈를 보기 힘들게 되었다. 슈퍼 패미컴 시절의 전성기를 달리던 J-RPG는 이제 더이상 생명의 불씨가 많이 약해졌다.

심볼 인카운터

단점이 많았던 “랜덤 인카운터” 방식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심볼 인카운터”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랜덤 인카운터 방식과는 다르게 게이머의 눈에 화면 상의 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이상 게이머들은 맵 위에 적이 있으면 원치 않은 전투는 적을 피해가며 맵이나 던전을 이동할 수 있었다.

슈퍼 패미컴에서는 “성검전설” 이나 “크로노 트리거” 가 이런 방식을 택해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이 두 게임들은 슈퍼 패미컴의 소프트 중에서도 굉장히 용량이 크고 고가의 게임이었다.

차세대 게임기가 활성화되면서 더이상 맵 위의 적을 표현하는데 메모리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자, 많은 J-RPG 장르의 게임들이 랜덤 인카운터 방식보다는 심볼 인카운터 방식을 선호했다.

솔직히 맵 위의 적이 보이는 심볼 인카운터 방식이 적이 보이지 않는 랜덤 인카운터 방식보다는 현대적이고 더 현실적인 게임의 표현 방법이었다. 누구나 이제 낡은 옛날 방식인 랜덤 인카운터 방식은 사라질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게임계의 동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흘렀다. 차세대 게임기의 성능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윈도우95 라는 복잡한 연산을 순식간에 처리해버리는 괴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J-RPG의 인기는 나날이 식어갔다. 대세는 서양에서 대규모 자본으로 만들어내는 실시간 액션을 기반으로 한 핵앤슬래쉬 RPG나 어드벤쳐 게임들이 시장에 새로운 유행을 이끌었다.

심볼 인카운터 방식을 채택한 J-RPG 게임들이 시장의 바람을 이끌기도 전에 이미 대세가 액션 어드벤쳐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심볼 인카운터 방식이 전혀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몬스터가 눈에 보이니 플레이어는 잡기 싫은 몬스터를 피하고 잡고 싶은 몬스터만 골라잡는 이른바 몬스터 편식이 가능했다. 그리고 화면에 몬스터가 많은 게임은 모험에서 볼 수 있는 드넒은 대지나 광활한 맵의 풍광을 즐기기 보다는, 무찔러야하는 수많은 몬스터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무쌍 게임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J-RPG 게임이 출시되지 않다보니 과거 패미컴이나 슈퍼 패미컴 시절의 명작 J-RPG가 보다 발전된 그래픽으로 리메이크 되며 장르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아쉽게도 게임 환경의 급변에 의해 심볼 인카운터 J-RPG 게임의 시대는 오질 않았다.

어느 것이든 결국은 게임 속의 하나의 톱니바퀴

J-RPG 게임에서 적을 만나는 두 방법 사이에서 정답은 없다. 현재에 출시되고 있는 인디 개발 업체들의 J-RPG 게임에서도 랜덤 방식이든 심볼 방식이든 어느 하나가 우세한 경향을 띄고 있지 않는다. 그 무엇이 되었든 서로의 장단점이 있고 즐기는 세대나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과거 J-RPG 장르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많은 일본의 개발사들은 이제 J-RPG에서 손을 떼고 점점 시대의 흐름인 액션 RPG 게임으로 넘어 가고 있는 경향이 눈에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J-RPG 장르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많은 인디 개발자들이 지금의 시대에도 계속해서 명작 J-RPG 게임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방대한 모험을 하는 J-RPG 게임에서 적을 조우하는 방식은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게임을 개발하고 매커니즘을 디자인하는 입장에서도 항상 고민되는 이슈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고민과 갈등이 더 좋은 J-RPG 게임을 만들어내고 장르를 발전시켜 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는 점을 필자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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